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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추천도서(22.3~23.2)/2022-4

4월의 추천도서 (3326) 대약탈박물관

1. 책소개

 

국가를 구분하는 것이 국경이라면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박물관이다
‘베닌 브론즈’를 통해 본 서양 박물관의 약탈의 역사

 

제국주의의 전리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을 그저 중립적인 유물의 보관소로 보아야 할까? ‘베닌 브론즈’는 식민주의의 탐욕성과 수탈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다. 나이지리아 베닌시티 일대를 통치했던 오바(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수천 점의 청동 장식판과 세공 상아 작품을 통칭하여 이르는 ‘베닌 브론즈’는 1897년 영국의 공격 당시 약탈되었다. 그렇게 약탈된 문화재는 빅토리아 여왕의, 영국박물관의, 그리고 수많은 개인 수집가들의 소장품이 되었다. 오늘날 ‘베닌 브론즈’는 문화재 반환과 배상, 박물관의 탈식민화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다.
옥스퍼드대학 피트 리버스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지은이 댄 힉스는 당시 영국군의 응징 작전들을 더 큰 군사적 움직임의 차원에서 분석하고 베닌시티에서 벌어진 파괴가 오늘날까지 어떤 영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재고해보고자 한다. 이 ‘작은 전쟁’의 이론과 배경, 전개 과정, 피해 상황, 특히 ‘베닌 브론즈’라 불리는 청동 문화재의 대량반출과 그 이후 전 세계로 흩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이 사례를 통해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식민지적 폭력을 드러내고 약탈 문화재 전시의 문제점을 역설한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댄 힉스 (Dan Hicks)

옥스퍼드대학 현대고고학 교수. 피트 리버스 박물관의 큐레이터이자 옥스퍼드 세인트크로스칼리지의 펠로이기도 하다. 2017년 영국 왕립인류학회에서 수여하는 리버스 기념상을 받았으며, 2017~2018년 파리 케 브랑리 자크 시라크 박물관에 교환교수로 파견되어 근무했다. 《역사고고학에 대한 케임브리지 안내서(The Cambridge Companion to Historical Archaeology)》를 비롯해 여러 저서에 공동 필자로 참여했다.
Twitter @ProfDanHicks 

출처:교보문고

 

3. 목차

 

머리말

1장 두 번 발사되는 총
2장 약탈의 이론
3장 죽음과 상실의 기록, 네크로그라피
4장 백인적 투사
5장 0차 세계대전
6장 기업적·군국적 식민주의
7장 폭정과의 전쟁
8장 베닌-나이저-수단 원정
9장 베닌시티 약탈
10장 대량학살
11장 문화적 삭제
12장 약탈
13장 죽음과 상실의 역사, 네크로로지
14장 무기의 박물관
15장 시간의 정치학
16장 선전포고
17장 부정적 순간
18장 1만 개의 단절된 역사

맺음말: 반환의 10년

부록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머리말, 10~11쪽
이 책은 베닌 원정에 대한 서사를 비롯하여 “영국이 자국의 입맛에 맞게 기록한 역사”를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한, 의식적으로 “영국 중심적”인 이야기다. 나는 반환의 과정에서 유럽이 목소리를 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영국은 베를린 회의가 열린 1884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30년의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서 식민지적 폭력을 휘두르며 대량학살과 문화적 침탈을 자행했다. 우리에게는 그 30년의 ‘0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조사하고 그 내용을 밝힐 의무가 있다. 나는 이 책이 영국의 기업적·군국적 식민주의가 저지른 만행의 규모를 돌아보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1장 두 번 발사되는 총, 31쪽
전리품을 챙기는 행위가 당시 기준으로는 보편적인 관행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쟁에서의 약탈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베닌 약탈은 단순히 전장의 물건을 가져오는 것 이상의 행위였다. 그것은 시간에 개입하여 현재 안에 영원한 과거를 창조함으로써 타자성을 만들어내는 무기였으며, 물건 자체의 경제적 청산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명시되지 않은 모든 권리, 모방과 풍자의 권리까지 단번에 빼앗아오는 행위였다. 이 약탈은 폭력이 커지며 나타난 부수적인 현상도 아니었고 스크랩북이나 진열장을 채울 기념품을 모으는 행위도 아니었다. 영국이 베닌에서 약탈한 물건들은 ‘유물’이 되어 과거의 폭력을 몇 번이고 현재로 소환했다. 과거의 물건과 이미지,
시간과 지식은 박물관을 통해,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미래로 연장된다. 베닌의 물건들은 공공 박물관에서, 그리고 개인 컬렉션에서 일종의 무기가 됐다.

2장 약탈의 이론, 45쪽
인류학은 더 이상 생각에만 잠겨 있어서는 안 된다. 나이지리아,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서 가져온 문화재에 관한 논의를 더는 미룰 수 없다. 인류학계와 고고학계는 이제 아프리카 약탈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시작해야 한다. 아프리카 약탈은 제국주의가 진행되며 우연히 발생한 부작용이 아니라 수탈적·군국적 식민주의와 간접적 통치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된 핵심적인 기술이었다. ‘세계문화’ 박물관은 분명 그 무자비한 약탈의 일부였으며, 그 상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3장 죽음과 상실의 기록, 네크로그라피, 58~59쪽
현재의 유럽 인류학 박물관은 공공의 공간인 동시에 현재도 진행 중인 식민역사의 지표다. 박물관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 시급한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그 두 가지는 바로 대영제국에 대한 잘못된 서사를 바로잡는 것, 그리고 남반구의 다양한 공동체를 지원하여 완전히 새로운 모델의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죽음과 상실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기존의 ‘얽힘’ 이론과 ‘사물의 생애사’ 이론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4장 백인적 투사, 68쪽
이들이 사용한 핵심 전략은 강자와 약자를 지속적으로 뒤바꿔 백인을 피해자로 그리는 백인적 투사였다. 베닌 원정을 ‘응징 작전’으로 그린 것은 이러한 투사의 작용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와 에드워드 시대에 아프리카를 상대로 상업적 이익을 거두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폭력을 자행한 것도, 오늘날 영국의 박물관이 그 시기의 약탈 문화재로 채워진 것도 바로 이런 투사가 가능하게 한 것이다. 투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단순했다. 상대방이 먼저 피해를 주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이를 핑계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사실은 가해자였다는 점이다.

5장 0차 세계대전, 82쪽
유럽 열강들은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아프리카 분할을 논의했다. 베를린 회의 이후 약 30년간 영국과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남반구에서 벌인 군사 활동은 20세기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의 전조가 된 ‘0차 세계대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영국은 이 시기 ‘무한 전쟁’을 통해 아프리카 지역의 왕과 군대, 마을을 차근차근 제거해나가며 새로운 ‘간접’ 통치 모델을 수립했다. 노예무역을 철폐하겠다며 시작된 ‘인도주의적’ 군사 행동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향할수록 변질됐고, 그 과정을 맥심기관총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수월케 했다.

6장 기업적·군국적 식민주의, 113쪽
이 시기 작성된 공식 보고서들은 하나같이 빽빽한 밀림에서 로켓포와 기관총으로 진행한 작전의 특성상 “사망한 원주민의 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자행된 폭력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이 모든 작은 전쟁과 원정들이 사실은 하나의 연속적인 정복 작전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국은 이후로도 1890년대 내내 그 지리적 범위를 넓혀가며 아프리카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폭정과의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7장 폭정과의 전쟁, 121쪽
영국이 주장한 이 폭정과의 전쟁에서는 상호성의 형태로 일종의 시간에 대한 폭력이 작동했다. ‘군국적 식민주의’ 이론이 절도를 두고 일종의 상환으로 정당화한 것과 유사한 과정을 통해 전쟁을 정당화했다는 의미다. 절도의 정당화에서도 전쟁의 정당화에서도 시간적 순서의 뒤바뀜이 일어났다. 영국은 자국의 공격에 대한 아프리카의 저항을 수년간 치밀하게 계획한 공격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정작 오랜 시간 계획하여 조직적으로 실행에 옮긴 자국의 아프리카 공격은 순전히 대응 차원의 공격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북쪽에 위치한 나이저회사 영토에서 노예사냥이 벌어지고 있다는, 남쪽의 보호령 영토에서 인신공양이 벌어지고 있다는 핑계를 빼놓지 않았다. 시간의 왜곡을 활용한 이 투사는 아프리카의 정권 교체를 위해 군국적 식민주의의 이념과 ‘인권적인’ 합리화를 이용하는 군국적 인도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8장 베닌-나이저-수단 원정, 140쪽
베닌 원정은 결코 부수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이 원정에서 나타난 나이저회사와 보호령의 협력은 나이지리아가 영국의 직접적인 식민지로 태어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반이 됐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나이저회사와 영국 정부 사이에 인적·정치적 차이가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나이저회사와 보호령의 의사결정 과정 또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던 것도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는 외교부와 식민부의 이해관계를 점차 통합해나간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물려받은 베닌 원정에 대한 서사에서는 당시 식민부의 의도에 따라 나이저회사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축소되어 있다. 그러나 베닌 원정은 양측의 합동작전이었고, 회사는 원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9장 베닌시티 약탈, 156쪽
베닌시티 약탈은 인간의 생명과 문화, 신념과 예술, 그리고 주권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 공격은 나이저회사와 보호령의 결탁 속에 점점 극심해지고 있던 나이저 삼각주 지역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대량학살의 강행군 속에서 실행됐다. 영국은 이 지역의 족장들을 제거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겁박하고 쫓아내고 학살했다. 이 모든 것은 현지에서 오랜 세월 통치해온 왕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교체하기 위한 새로운 시대의 대규모 군사 작전의 일부였다. 영국 여왕의 재위 6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프랑스와 독일의 식민 정책이 변경되며 영토 확보에 대한 압박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통치권의 새로운 지정학이 등장했다. 통제의 도구로서 단순히 영토가 아닌 시간을 활용하는 ‘시간의 정치학’이었다.

10장 대량학살, 159~160쪽
베닌 원정으로 인한 사상자 규모를 한번 파악해보자. 작전 중 사망한 영국 측 인원은 총 여덟 명이었다. 장교 한 명, 사병 세 명, 해병대 병사 한 명, 의사 한 명, 보호령 병사 한 명, 그리고 안내인 한 명이었다. 그 외 마흔 명 정도가 중경상을 입었다. 베닌 측 병사나 시민의 사상자 규모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 측에는 3백만~4백만에 달하는 탄환과 맥심기관총 38정, 산악총 12정, 로켓포 6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만 상대편에서 어느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작전 중 사망한 영국인의 경우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고, 일부 지역 교회에는 그들을 기리는 명판도 걸려 있다. 하지만 영국의 공격으로 사망한 비니족과 이츠키리족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11장 문화적 삭제, 178쪽
에저튼의 기록을 보면 영국군이 베닌시티 점령 후 자행한 파괴가 조직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파괴는 하루아침에 베닌시티를 살아 있는 도시에서 고고학적 유적으로 바꿔놓았다. 다음날인 2월 21일 일요일에는 왕궁이 잿더미가 됐다. 추후 영국은 이것이 사고였다고 주장했지만, 단순한 사고였다기보다는 약탈의 광기 속에 벌어진 실수였을 것이다. 이 화재 탓에 영국은 왕궁에 저장해두었던 물건들 중 일부를 잃기도 했다. 건물에 대한 방화는 파괴뿐 아니라 시신을 태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랄프 무어는 이를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불이 나서 왕궁과 그 주변 구역이 모두 파괴되어버렸다. 그 탓에 숙소도 보급품도 부족해져서 야외 막사에서 생활하게 됐지만 불은 그 모든 불편을 충분히 보상해줄 만큼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화해주었다.”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현대의 서양 박물관은 대부분 세심한 선택과 기획을 거친 제국주의 시대 약탈물로 채워져 있다.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진열장에 전시된 문화재 옆에는 이름과 날짜, 출처가 적힌 설명판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이 훔쳐온 물건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국가를 구분하는 것이 국경이라면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박물관이다
‘베닌 브론즈’를 통해 본 서양 박물관의 약탈의 역사

1897년 1월, 10여 명의 영국인 사절단이 서아프리카 베닌 왕국을 방문하던 중 원주민의 습격으로 사절단의 상당수가 살해당하는 ‘베닌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빌미로 영국은 1897년 2월부터 약 3주간 이른바 ‘베닌 원정’이라 불리는 ‘응징 작전’을 통해 수천에 달하는 대량학살과 마을 파괴, 그리고 심대한 문화적 약탈을 자행한다. 옥스퍼드대학 피트 리버스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저자는 이 ‘작은 전쟁’의 이론과 배경, 전개 과정, 피해 상황, 특히 ‘베닌 브론즈’라 불리는 청동 문화재의 대량반출과 그 이후 전 세계로 흩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이 사례를 통해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식민지적 폭력을 드러내고 약탈 문화재 전시의 문제점을 역설한다.
《대약탈박물관》은 1897년 2월 베닌시티에서 벌어진 영국 군대의 폭력적인 약탈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당시 영국군의 응징 작전들을 더 큰 군사적 움직임의 차원에서 분석하고 베닌시티에서 벌어진 파괴가 오늘날까지 어떤 영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재고해보고자 한다. 베닌시티 원정은 나이지리아를 영국의 보호령이자 식민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영국이 서아프리카에서 벌인 수많은 ‘응징 작전’은 사실 응징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베닌시티 원정에서 영국군이 약탈한 왕실 예술품과 종교적 성물들은 전 세계의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베닌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물관과 미술관의 수는 150곳 이상이다.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베닌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비공개 컬렉션의 수도 그 절반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적 폭력, 대량학살, 문화적 침탈
그것은 ‘0차 세계대전’이었다

유럽 열강들은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아프리카 분할을 논의했다. 베를린 회의 이후 약 30년간 영국과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남반구에서 벌인 군사 활동은 20세기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의 전조가 된 ‘0차 세계대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영국은 이 시기 ‘무한 전쟁’을 통해 아프리카 지역의 왕과 군대, 마을을 차근차근 제거해나가며 새로운 ‘간접’ 통치 모델을 수립했다. 노예무역을 철폐하겠다며 시작된 ‘인도주의적’ 군사 행동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향할수록 변질됐고, 그 과정을 맥심기관총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수월케 했다. 이 시기 작성된 공식 보고서들은 하나같이 빽빽한 밀림에서 로켓포와 기관총으로 진행한 작전의 특성상 “사망한 원주민의 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자행된 폭력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이 모든 작은 전쟁과 원정들이 사실은 하나의 연속적인 정복 작전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국은 이후로도 1890년대 내내 그 지리적 범위를 넓혀가며 아프리카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폭정과의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폭력으로 강탈한 약탈물을 전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야만적이다

식민지 폭력의 전리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을 그저 중립적인 유물의 보관소로 보아야 할까? 박물관은 그저 아프리카의 예술품과 유럽의 조각, 회화를 나란히 전시함으로써 아프리카의 창의성을 보여주고 매년 박물관을 찾는 수백만의 관람객에게 세계문화유산을 보여주는 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식민지에서 학살을 통해 약탈한 왕실 유물과 성물을 지금처럼 계속 전시하는 한 박물관은 ‘인종과학’의 이름으로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폭력적인 장소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박물관은 전쟁기념관처럼 유럽과 북미 곳곳에 자리 잡은 채 남반구의 후진성을 강조하는 장치가 되고, 극단적 폭력과 문화적 파괴의 연장에 공모하는 장소, 대규모 학살과 문화재 파괴, 그리고 지속적인 비하의 상징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식민지 약탈물의 반환은 균형의 문제도 아니고, 편을 가를 문제도 아니다. 약탈물 반환은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문제를 지적하고, 지금도 진행 중인 제도적 인종주의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다. 놀랍게도 영국 박물관계의 고위 전문가나 정치인들 중에는 여전히 아프리카 국가들의 문화재 관리 능력을 문제 삼는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1896년 아샨티 전쟁에서 ‘발견’된 14세기 영국 청동 물주전자를 영국박물관으로 가져오며 근 500년의 세월동안 물주전자를 잘 보관해온 아샨티의 관리 능력을 문제 삼았던 것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돌려줘봤자 누가 다시 훔쳐갈 뿐”이라는 말은 도둑들의 표어일 뿐이다. 영국의 국립박물관들은 (나치 약탈 예술품이나 인간유해 반환이라는 예외가 분명이 있었음에도) 소장품 처분을 허락하지 않는 법을 탓하며 훔쳐온 것들을 되돌려주지 않고 원소유국에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베닌 브론즈가 쏘아 올린 약탈 문화재 반환 논쟁

‘베닌 브론즈’는 식민주의의 탐욕성과 수탈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다. 나이지리아 베닌시티 일대를 통치했던 오바(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수천 점의 청동 장식판과 세공 상아 작품을 통칭하여 이르는 ‘베닌 브론즈’는 1897년 영국의 공격 당시 약탈되었다. 그렇게 약탈된 문화재는 빅토리아 여왕의, 영국박물관의, 그리고 수많은 개인 수집가들의 소장품이 되었다.
‘베닌 브론즈’는 문화재 반환과 배상, 박물관의 탈식민화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다. 《대약탈박물관》에서 댄 힉스는 베닌 브론즈의 즉각적인 반환을 강력히 촉구하는 한편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식민지 시대 부채 청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출처: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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