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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추천도서(25.3~)/2025-04

4월의 추천도서 (4412) 사상계 재창간 1호

 

 

우리가 알고 있는 월간『思想界』는 원래 1952년 8월 문교부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思想』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6·25의 와중에서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의의 확립 및 반공정신 양양 등 전시하에 있는 지식인층의 사상운동을 주도하는 사상지로의 역할을 하며, 통권 4호를 낸『思想』은 편집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장준하 선생이 1953년 4월에 단독 인수하여『思想界』라는 제호로 시판하면서 본격적인 월간종합교양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창간호 3,000부가 발간과 동시에 매진되는 등 전후(戰後)의 사상적 자양으로서 1950년대 지식인층과 학생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思想界』는 초기에 A5판 100면 내외로 발행되기 시작하여 이후 400면 내외로 증면되었다.

 

『思想界』편집의 기본방향은 1) 민족통일문제, 2) 민주사상의 함양, 3) 경제발전, 4) 새로운 문화창조, 5)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으로 요약된다. "『思想界』란 …… 동서고금 사상을 밝히고 바른 세계관·인생관을 수립해보려고 기도한다."라고 밝힌 발간 취지에서 알 수 있듯이 발행 초기에는 정치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종으로 5000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으로 만방의 지적 소산을 매개하고 공기로서 자유·평등·평화·번영의 민주사회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이『思想界』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후 '동인문학상', '사상계논문상', '사상계번역상', '신인문학상' 등 사상 및 문예활동의 본산으로서『思想界』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였다. 또한 자유언론투쟁에 앞장섰던 발행인 장준하 선생은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3공화국 하에서『思想界』는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저항적·정치비판적 민족주의 논조에 비중을 둔 정치평론이 빈번하게 지면을 채우면서 정치탄압의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장준하 선생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1968년 이후 『思想界』의 발행권이 부완혁 선생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 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영의 어려움은 가중되었고, 급기야 1970년 5월에 김지하의「오적(五賊)」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당국의 폐간처분을 받게 된다. 『思想界』가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기고 만 것이다.

 

『思想界』의 자랑이라면 무엇보다도 당대의 최고 지성으로 구성된 편집위원진을 들 수 있다. 소설가 김성한(金聲翰, 前 동아일보 편집인), 철학자 안병욱(安秉煜, 前 숭실대 교수), 해방 후 중국에서 학업을 마친 뒤 귀국한 사학자 김준엽(金俊燁, 前 고려대 총장) 등 3총사와 지명관(池明觀), 양호민(梁好民) 교수 등이 주간과 상근편집위원으로 편집위원들을 이끌었다. 또 나중에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金相浹), 유창순(劉彰順), 현승종(玄勝鐘) 씨도 편집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계창호(桂昌鎬, 前 일간스포츠 편집국장)씨가 손세일(孫世一, 前 국민회의 원내총무) 등 서울대 문리대 동창생들을 몰고 입사하는 등 젊은 인재들도 기자로 일했으며, 함석헌(咸錫憲)씨는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최장수 지령을 기록한『思想界』는 학계·문화계에 수많은 문필가를 배출한 공적을 남겼으며, 1950~1960년대의 계몽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이념지향적 월간지로서 한국잡지사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장준하 (張俊河) 

 

출생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
(現 평안북도 신의주시 연하동)
사망
1975년 8월 17일 (향년 56세)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
(現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민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아래의 내용은 김삼웅 장준하 평전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
 
 
 
 
2. 생애
 
1)초기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석인(張錫仁)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북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부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니고, 부친이 선천의 신성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어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신앙에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도일하여 토요대학 예과를 거쳐 장로회 계통인 일본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일본신학교에 유학가기 위한 돈이 모자라 정주군 신안소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한 적도 있다. 신성중학교 재학 시절 일제에 저항하라는 교장이 일본 순사들한테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잡혀가자 격분하여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배울 수 없다"며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장준하의 친구가 목사 문익환이었다.

 

2)입대

 

그 후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명목상 자원 입대했고,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한다.[25][26] 당시 학도병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 말만 자원 입대일 뿐 강제 징집이 됐기에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간 것이었다. 장준하는 지원하면서 이미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학도병 출신끼리 모여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면서 활발히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어 중국 장쑤성 쉬저우에 주둔하고 있는 츠카다 부대에 징집되었다.

중국 전선으로 파병나가기 전 아직 평양 조선군부대에 있을 때 엄지손가락이 부어오른 적이 있었는데 일본군 군의관이 "마취제가 없는데 참을 수 있겠나?"라고 하자 괜찮다고 하였고, 군의관이 메스로 생살을 베는데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군의관이 돌팔이라서 엉뚱한 곳으로 세 군데 이상을 째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 따르면 이렇게 치료받은 후에 츠카다 부대에 징집되어 파병나가기 전, 일본군 사령관이 그런 몸으로 중국까지 가서 제대로 싸울 수 있겠냐고 묻자 이를 악물고 '이런 몸으로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 군인이 있음을 적국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이 '실로 훌륭한 천황폐하의 병사로다!'라며 감탄했다고도 한다.

 

3)광복이후

 

8.15 광복 3일 뒤인 1945년 8월 18일,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미군과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일본군과의 대치 끝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만약 이 때 귀국에 성공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외독립운동 세력 중 가장 빨리 귀국한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했으며처음에는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이 인맥으로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비서를 역임하다가 이범석의 족청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반공주의자 이범석의 노선조차도 '좌파적 색채가 난다'면서 바로 때려치웠다고 한다.

이후 한신대에 편입해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제1공화국에서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의 추천으로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장준하와 사상계 직원들이 같이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제2공화국에서는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제2대 국토건설단 단장 등을 지냈다.

 

4)5.16군사정변~제3공화국 시기

 

1961년 당시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였던 박정희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가 약속했던 조속한 민정 이양을 할 의도가 없음을 알게 된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박정희의 독재 행위를 막기 위해 윤보선 야당 통합 후보로 만드는 활동을 벌이며 비판적인 언론 활동을 했는데 이때 낸 잡지는 독립군 시절 중국에서 동지들과 잡지를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만든 것이다.

이후 사상계를 계속 펴내며 박정희 반대 운동을 했지만 정치계에서는 유진산의 행보로 인해 야당이 박살나고 언론계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온갖 방해로 인해 사상계를 펴낼 수 없게 되자 결국 정치인이 되기로 한다.

이때 국회의원 선거 활동을 위해 유세를 하면서 박정희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것과 박정희 정권 시절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박정희가 밀수 왕초"라며 박정희가 사카린 밀수 사건의 배후임을 주장한 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발언으로 남아 있으며 1967년부터는 제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5)의문스러운 죽음

 

6)저서

 

<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도서출판 돌베개>
학병들의 저서 중에서는 김준엽 고려대 총장의 <장정>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 2015년에 순한글에 문장을 손본 전면개정판이 나와 구하기도 쉽다.

일본군 탈출후 임시정부를 찾아 6천리 장정을 떠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애국자인지 여실히 드러나는데, 가족들의 탄압을 각오하고 본인의 죽음의 공포를 수없이 겪으며 오직 독립운동, 오직 임시정부를 만나기 위해 그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조국이 준 유일한 무기인 '젊음'이 있다며 50여명의 동지들과 악으로 깡으로 행군한다.(이중 학병은 김준엽 등 33명) 장준하는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에도 붙었으며, 가만히 있으면 살고 도망가면 죽는 와중에 탈출을 감행하였다. 게다가 장준하와 함께 임시정부로 탈출한 학병만 33명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충칭의 임시정부에서 흩날리는 태극기는 애국가 가사조차 제대로 못 외우는 청년들에게 엄청난 감격을 준다. 하지만 그들은 단 며칠만에 임시정부내 지독한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나중에는 유동열이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하자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가 작살내고 돌아올 정도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수많은 한인들 앞에서 임정을 찾아 온 것을 후회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비행기를 몰고 이곳에다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싶다며 연설하는 장면이 압권.

저서 곳곳에서 김구, 지청천, 이범석에게 엄청난 존경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을 보면 이 당시 장준하는 극단적인 극우파이며 자신을 김구 계열로 포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강준만의 현대사에서도 해방 극초기까지 김구는 극단적인 극우파로 평가하고 있으니, 김구 직계가 되려면 장준하 역시 극우로 갈 수 밖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장준하는 정작 해방정국 당시에는 김구보다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노선을 더 지지하는 성향을 보이는 등 김구의 정치 행보를 썩 긍정적으로 보진 않았었다. 훗날 장준하가 김구 직계를 자처하게 된 건 1970년대 이후 기존 반공 시선에서 많이 벗어났을 때다.

제목인 돌베개는 일본군에서 탈출을 결행하겠다는 뜻으로 편지에 사용하겠다며 아내와 약속한 단어이다. 아내에게 성경구절이 들어간 편지를 받게 되면 그 편지가 마지막인 줄 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는 만주의 일본 군사학교에서 탈출해 충칭의 임시정부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이 돌베개는 성경구절 중 창세기 28장 11절인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에서 따온 구절이며, 임시정부를 찾아 6천리 장정을 하며 고생할 때 돌베개를 베고 잔다며 자주 등장한다. 파촉으로 넘어 갈 때는 깊은 산에 눈이 쌓여 눈베게를 베고 잔다며 자조하는 식이다. 여담으로 장준하는 개신교 신자였고, 아내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죽기 얼마 직전 본인이 개종하고 혼인성사를 했다.

파주에 있는 그의 무덤에 가면 돌베개에서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3. 연표

 

  •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
  •  
  • 1932년: 평안북도 삭주군 대관초등학교 졸업,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65]
  • 1937년 4월: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 1940년 4월: 도쿄 일본신학교 입학
  • 1943년 11월: 김희숙과 결혼
  •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7월에 탈출함
  •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 교육을 받음
  • 1945년 2월: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에 편입, 광복군 대위에 임관되어 독립 투쟁에 몸바침
  • 1945년 8월: 중국 시안시에서 미 육군 군사 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요원으로 대기하다가 해방을 맞음
  • 1945년 8월 18일: 독립군 신분으로 서울에 들어왔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다시 돌아감
  •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중 한 사람으로 조국에 돌아옴
  • 1949년 2월: 한신대학교에 편입학하여 6월에 졸업
  • 1952년 9월: 월간 "사상" 창간
  •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발행하여 자유-민주-반독재 투쟁에 기여함
  • 1961년 1월: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음
  •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상을 받음
  • 1965년: '조국수호협의회'에 참여하여 한-일 조약 반대 투쟁을 벌임
  • 1966년 9월: 한국 비료밀수사건 규탄 연설 중 이른바 '밀수 왕초' 사건으로 1달간 옥고를 치름
  • 1967년 3월: 4자 회담을 주선, 야당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함
  •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1달간 옥고를 치름
  • 1967년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현 서울 중랑갑) 국회의원에 당선됨
  • 1970년 2월: 새로운 민족세력의 규합을 위하여 신당 운동을 추진함, 민족 문제에 대한 전망을 안고 민족학교 설립 운동에 참여함
  • 1971년: '민주 수호 국민 협의회'에 참여함
  • 1973년 2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 위원에 임명됨
  • 1973년 12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여 구속됨
  • 1974년 4월: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2월에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됨
  •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투성이의 사고로 사망함
  •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
  •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을 받음
  • 1999년 11월 1일: 문화훈장금관장을 받음

 

 

 

 

 

(張俊河)